선관위 '투표용지 참사', 독립성 뒤에 숨은 무능
2026-06-09 22:01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독립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으며 존립 근거마저 위협받고 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노태악 전 중앙선관위원장이 물러났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히 수장의 교체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진단한다. 독립성을 명분으로 외부의 감시와 견제를 차단해온 선관위가 실제로는 사법부 고위 법관들의 명예직 전유물로 전락하면서, 실무 역량 저하와 책임 공백이 고착화되었다는 지적이다. 헌법은 위원장을 위원 중에서 호선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대법원장이 지명한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는 60년 전의 관행이 여전히 조직을 지배하고 있다.선관위의 인적 구성은 사법부 편중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9명의 위원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6명이 판사나 법조인 출신으로 채워져 있으며, 이는 중앙부터 읍·면·동 단위까지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법관 지배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시·도 선관위원장은 지방법원장이, 구·시·군 위원장은 부장판사가 겸직하는 관례는 선거 관리의 전문성보다는 사법부의 조직 논리를 우선시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구조는 선거 결과를 다투는 소송의 관리자와 심판자가 같은 직역에서 나오는 이해충돌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 전문가나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반영될 틈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특권 의식은 예산 운용에서도 드러났다. 비상임 명예직인 위원들에게 법적 근거 없이 월정액 수당을 지급해오다 감사원의 지적을 받았음에도, 선관위는 법 개정을 통해 이를 합법화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현재 위원장과 위원들은 매월 수백만 원에 달하는 공명선거추진활동비 등을 정기적으로 수령하고 있다. 국민의 참정권을 수호해야 할 기관이 정작 자신들의 혜택을 챙기는 데는 열을 올리면서, 선거 관리라는 본연의 임무에서는 투표용지 수량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을 드러낸 셈이다. 이러한 모순된 행태는 선관위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제 선관위를 해체 수준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대법관이 위원장을 겸직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상임위원 중심의 책임 경영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된다. 선거 관리의 중립성은 법관의 명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공정과 철저한 실무 역량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헌법기관으로서의 권위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는 선관위의 비정상적 구조를 타파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제도는 언제든 다시 흔들릴 수 있다.
임시원 기자 Im_Siwon2@trendnewsreaders.com

13일까지 개최되는 사진전 ‘바람의 길목, DMZ’는 분단이 남긴 상흔과 그 안에서 피어난 생명력을 80여 점의 기록물로 증명한다. 이번 전시는 일본의 거장 구와바라 시세이를 비롯해 박종우, 김녕만, 최병관 등 DMZ의 찰나를 기록해온 국내외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관람객들은 철책 너머에 가려져 있던 한반도의 허리, 그 내밀한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전시의 백미 중 하나는 1989년 판문점의 찰나를 포착한 김녕만 작가의 ‘우산 아래 남북 기자들’이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남북의 기자들이 하나의 대형 우산 아래 모여 담배를 나누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분단의 벽이 무색해지는 인간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왼쪽 팔뚝의 ‘PRESS’ 완장과 북측의 ‘기자’ 완장이 대비를 이루면서도, 같은 비를 피하는 이들의 모습은 DMZ가 단절의 공간인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교류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사진은 과거 사진집으로만 공개되었다가 이번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 실물로 공개된다.흑백과 컬러를 넘나드는 사진들은 DMZ 내부에 정체된 시간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남북이 각각 2km씩 물러나며 형성된 이 공간은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 독특한 생태계를 구축했다. 잡초가 무성해져 형체만 남은 금강산행 철길과 지뢰밭 속에 둥지를 튼 두루미 떼의 모습은 전쟁의 비극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후고구려 궁예의 옛 성터인 풍천원이 적막한 산수화처럼 변해버린 풍경은 역사의 무상함과 DMZ의 고요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전시장은 최전방 GP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절경과 남북이 자존심을 걸고 벌였던 국기 게양대 높이 경쟁 등 냉전의 산물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남측의 99.8m와 북측의 160m 게양대가 대치하는 모습은 분단의 긴장감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또한 민간인 통제구역 내 대성동 마을 주민들의 고단한 삶을 포착한 기록들은 DMZ가 단순히 군사적 공간이 아닌,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의 터전임을 일깨워준다. 철책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수달의 모습은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의 허망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기획을 맡은 권기준 학예연구사는 미디어 설명회를 통해 이번 전시가 흩어져 있던 DMZ 기록의 정수를 한자리에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복잡한 설명보다는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를 앞세워, 분단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와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려는 외국인들에게 DMZ의 실체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80여 점의 사진은 각각의 프레임 속에 갇힌 역사를 끄집어내어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평화의 길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이번 전시가 분단의 유산을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73년간 굳게 닫혀 있던 바람의 길목을 사진이라는 매개체로 열어젖힌 이번 기획전은 오는 9월 중순까지 무료로 운영된다. 관람객들은 전시장 창밖으로 보이는 현대적인 서울의 풍경과 전시장 내부의 적막한 DMZ 사진을 대비하며, 한반도가 처한 이중적인 현실을 체감하게 된다. 박물관 측은 전시 기간 중 작가와의 대화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DMZ에 담긴 역사적 층위를 더욱 깊이 있게 전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