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 무력화? 아리셀 경영진 형량 대폭 감형

2026-04-22 17:41

 경기 화성시 아리셀 공장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 참사와 관련해 경영진의 책임이 항소심에서 대폭 축소되며 사법 정의를 향한 유족들의 기대가 무참히 꺾였다. 수원지법 항소심 재판부는 22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순관 아리셀 대표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던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그의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 역시 징역 15년에서 7년으로 형량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미증유의 참사임에도 불구하고 1심의 준엄한 심판이 2심에서 대폭 완화되자 법정 안팎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판결 직후 법원 1층 로비에 모인 유족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재판부의 결정을 성토했다. 20대 딸을 잃은 한 어머니는 자녀가 대학 졸업 후 한국이라는 나라를 믿고 일했으나 시신조차 온전치 못한 상태로 장례를 치러야 했던 억울함을 호소했다. 유족들은 이주노동자가 희생되었다는 이유로, 혹은 피해자들이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이처럼 가벼운 처벌이 내려진 것이 아니냐며 울분을 토했다. 1심의 15년 형량조차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엔 부족하다고 느꼈던 이들에게 4년이라는 숫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에 가까웠다.

 


유족 측 법률 대리인은 이번 판결이 중대재해처벌법의 근간을 흔드는 사실상의 위헌적 판단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재판부가 감형의 주요 사유로 꼽은 '유족과의 합의'가 양형에 과도하게 반영되었다는 지적이다. 변호인은 생계를 책임지던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의에 응한 것인데, 이를 면죄부로 삼는다면 어느 경영자가 안전 관리에 비용을 쓰겠느냐고 반문했다. 사고가 나면 합의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으며, 이는 기업의 안전 보건 의무를 방기하도록 부추기는 결과와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아리셀 측의 과실과 책임이 무겁다는 점은 인정했다. 화재 발생 이틀 전 이미 선행 폭발이라는 명확한 위험 신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이 이를 안일하게 판단해 공정을 강행했다는 점을 판시했다. 적절한 매뉴얼 마련과 준수만 있었어도 막을 수 있었던 인재였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평소 안전 조치를 완전히 방치한 것은 아니며, 이익 추구에만 몰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상반된 논리를 펴며 형량을 대폭 낮췄다. 이러한 재판부의 판단은 사고의 결과와 책임의 무게 사이에서 심각한 괴리를 보여주었다.

 


사건의 파장은 정치권으로도 번지고 있다. 아리셀 대책위원회는 이재명 대통령이 약속했던 산재 없는 세상과 이주노동자 차별 철폐가 공염불이 되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대책위는 최근 청와대를 방문해 아직 수습되지 못한 가족의 유해를 찾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정부의 대응이 매우 미온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통령이 직접 유해 수습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밝히고, 이번 판결로 상처받은 유족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참사 이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유해 수습 문제는 유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의 씨앗이 되고 있다.

 

이번 아리셀 판결은 노동 현장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이 실제 재판 과정에서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23명의 생명이 사라진 대가로 내려진 징역 4년이라는 판결은 한국 사회가 노동자의 생명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묻는 뼈아픈 질문이 되었다. 유족들은 재판 내내 피해자 측에 적대적이었던 재판부의 태도와 절차적 문제점을 지적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예고했다. 법정을 떠나지 못하고 오열하는 유족들의 모습은 안전한 일터를 꿈꿨던 수많은 노동자의 현실을 대변하며 무거운 과제를 남겼다.

 

임시원 기자 Im_Siwon2@trendnewsreaders.com

컬쳐라이프

박경리가 극찬한 방혜자, 빛의 연대기 최초 공개

고 방혜자 화백은 한지나 부직포처럼 거친 질감을 지닌 바탕 위에 천연염료와 황토를 덧칠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생전 어둠과 재난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빛을 전하고자 노력했으며, 그가 묘사한 원형의 도상들은 우주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상징하며 보는 이들에게 깊은 명상의 시간을 선사한다.방 화백의 작품은 종교와 국경을 초월해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울림을 주었다. 프랑스 파리의 실상사와 서울의 개화사에서는 그의 그림을 불상 뒤의 광배처럼 배치해 경건함을 더했으며, 세계적인 건축 유산인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은 그의 예술성을 인정해 성당 내부를 장식할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소설가 박경리는 생전 그와 깊은 교분을 나누며 그의 그림에서 해 뜨기 전의 아침과 같은 유현한 깊이를 느낀다고 평했다. 이러한 평가는 방 화백의 작업이 단순한 시각적 재현을 넘어 동양적 철학과 서양적 미학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음을 시사한다.국립현대미술관 청주가 오는 24일부터 개최하는 이번 전시는 국내 국공립미술관 차원에서 처음으로 마련된 방 화백의 대규모 회고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195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제작한 60여 점의 작품과 방대한 아카이브 자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관람객들은 작가 특유의 원형 회화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직후의 어두운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그 안에서 빛을 탐구하기 시작했던 초기 유화 작품들까지 감상하며 작가의 예술적 궤적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특히 이번 전시는 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자리인 만큼,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와 세르누치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던 귀한 작품들이 대거 한국을 찾았다. 전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샤르트르 대성당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 '빛의 탄생'을 재현한 공간이다. 실제 자연광이 투과되도록 설계된 전시 방식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마치 프랑스 현지 성당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박경리, 이응노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와 예술적 고뇌를 엿보게 한다.그동안 사립미술관을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소개되었던 방 화백의 작품 세계가 이번 국립미술관의 조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사 내에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프랑스 미술계가 일찍이 퐁피두센터 개인전 등을 통해 그를 거장으로 대우했던 것에 비하면 국내의 본격적인 재조명은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미술관 측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그간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던 방 화백의 회화적 가능성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그가 평생을 바쳐 추구했던 '빛'의 진정한 가치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방혜자 화백은 어린 시절 물결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본 이후 평생 그 찬란한 빛을 화면에 담기 위해 고심해 왔다. 이번 회고전은 작가가 세상에 남기고 간 마음의 빛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동서양의 경계를 허물고 우주적 조화를 꿈꿨던 그의 붓질은 2026년 봄, 청주의 전시실을 찾는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거장이 남긴 200여 점의 자료와 작품들은 이제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로 기록되며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빛으로 남게 되었다.